2017년 11월 29일 수요일 새벽기도회
사도행전 24장 17-23절
우리나라에서 ‘방위사업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방위사업청과 특정 방산업체의 비리는 처벌을 강화해도 끊이고 있지 않습니다. 방위사업청이 한 업체와 계약을 하면 그 계약을 이끌던 높은 위치의 군인이 방산업체의 높은 직급으로 이직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심지어 성능 미달인 것을 알고도 시험평가 보고서를 조작해 납품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음파탐지기 납품 비리, 복합소총 폭발사고, 차기전투기 엔진 결함 사고 등 알면서도 자신이 취할 이득 때문에 서로 눈감아 주다보니 방산비리의 몸집이 커져버린 것입니다. 본문에도 분명 누가 잘못했는지 알면서 눈감아주는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바로 벨릭스 총독입니다.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아는 것과 결단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2절을 보면,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1절에서 바울은 변론을 마칩니다. 변호사 더둘로의 모든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누가 들어도 무죄 판결이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벨릭스 총독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22절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더 자세히’라고 번역된 원어는 사실 ‘정확하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여기에서는 비교급으로 써있기 때문에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나 변호사 더둘로보다 바울이 말하는 ‘이 도’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 총독은 어떠한 결정도 없이 판결을 유보해버립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미 산헤드린 공의회보다 더 잘알고 있었던 벨릭스가 판결을 유보한 것은 사실상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왜 바울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24장 27절을 보면,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이유는 간단합니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고위층 유대인들에게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바울의 무죄를 선포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에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6절을 보면,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17절에서 바울은 민족을 구제할 돈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2년간 잡아놓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기간 동안 바울에게는 비교적 많은 자유를 주고 뇌물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벨릭스 총독은 복음에 대해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매주일 설교는 듣고, 새벽예배에 나와서 기도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삶에 결단하고 있지 않다면 복음을 알기는 하되, 복음대로 살지는 않은 벨릭스 총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는 것을 뛰어넘어 말씀으로 결단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2. 듣는 것과 믿는 것을 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3-24절을 보면,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비교적 많은 자유를 주고, 바울을 자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대해서 듣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종교적인 평안이나 지식적으로 채워지는 어떠함을 구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5절에 바울이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대해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는데 벨릭스 총독은 듣고 두려워하여 바울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통해서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익이나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저히 평안의 요소가 없다는 것과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고자 한다면 힐링 전문 강사들에게 가야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마다 찔림이 있어야 하고, 나에 대해 소망 없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소망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수차례 복음을 들었지만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는 ‘회심할 뻔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떨림있고, 주님을 향한 은혜와 소망이 있으십니까?
벨릭스 총독처럼 자주 듣는 모습을 뛰어넘어 두렵고 떨림으로 유일한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아는 것과 듣는 것에서 벗어나 결단하여 믿음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24장 17-23절
우리나라에서 ‘방위사업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방위사업청과 특정 방산업체의 비리는 처벌을 강화해도 끊이고 있지 않습니다. 방위사업청이 한 업체와 계약을 하면 그 계약을 이끌던 높은 위치의 군인이 방산업체의 높은 직급으로 이직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심지어 성능 미달인 것을 알고도 시험평가 보고서를 조작해 납품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음파탐지기 납품 비리, 복합소총 폭발사고, 차기전투기 엔진 결함 사고 등 알면서도 자신이 취할 이득 때문에 서로 눈감아 주다보니 방산비리의 몸집이 커져버린 것입니다. 본문에도 분명 누가 잘못했는지 알면서 눈감아주는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바로 벨릭스 총독입니다.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아는 것과 결단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2절을 보면,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1절에서 바울은 변론을 마칩니다. 변호사 더둘로의 모든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누가 들어도 무죄 판결이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벨릭스 총독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22절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더 자세히’라고 번역된 원어는 사실 ‘정확하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여기에서는 비교급으로 써있기 때문에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나 변호사 더둘로보다 바울이 말하는 ‘이 도’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 총독은 어떠한 결정도 없이 판결을 유보해버립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미 산헤드린 공의회보다 더 잘알고 있었던 벨릭스가 판결을 유보한 것은 사실상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왜 바울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24장 27절을 보면,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이유는 간단합니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고위층 유대인들에게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 자리에서 바울의 무죄를 선포하면 자신의 정치 생명에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6절을 보면,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17절에서 바울은 민족을 구제할 돈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2년간 잡아놓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기간 동안 바울에게는 비교적 많은 자유를 주고 뇌물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벨릭스 총독은 복음에 대해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매주일 설교는 듣고, 새벽예배에 나와서 기도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삶에 결단하고 있지 않다면 복음을 알기는 하되, 복음대로 살지는 않은 벨릭스 총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는 것을 뛰어넘어 말씀으로 결단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2. 듣는 것과 믿는 것을 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3-24절을 보면,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비교적 많은 자유를 주고, 바울을 자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대해서 듣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종교적인 평안이나 지식적으로 채워지는 어떠함을 구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5절에 바울이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대해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는데 벨릭스 총독은 듣고 두려워하여 바울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통해서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익이나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저히 평안의 요소가 없다는 것과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고자 한다면 힐링 전문 강사들에게 가야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마다 찔림이 있어야 하고, 나에 대해 소망 없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소망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수차례 복음을 들었지만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는 ‘회심할 뻔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떨림있고, 주님을 향한 은혜와 소망이 있으십니까?
벨릭스 총독처럼 자주 듣는 모습을 뛰어넘어 두렵고 떨림으로 유일한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아는 것과 듣는 것에서 벗어나 결단하여 믿음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아침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